한국연예스포츠신문

가스라이팅 : 우리는 건강한 관계일까?

한국연예스포츠신문 2021. 3. 18. 17:05

친밀한 관계에서 자주 일어나는 교묘한 정신적 학대 행위

피해자도 피해 사실을 인지하기 어려워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한국연예스포츠신문] 김지환 기자 = 최근 화두에 오르고 있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가스라이팅은 가해자가 타인의 심리와 상황을 조작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어 무력화시킨 후 지배력을 행사하고 피해자를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병리적 심리 현상을 말한다.

가스라이팅의 어원은 패트릭 해밀턴이 연출한 1938년 연극 ‘가스라이트‘에서 유래했다. 남편 잭은 보석을 훔치기 위해 윗집의 부인을 살해한다. 보석을 찾기 위해서는 가스등을 켜야 했는데, 가스등은 쓰는 동안 가스를 나눠 쓰던 다른 집의 불이 어두워져서 들킬 위험이 있다. 이 때문에 잭은 집안의 물건을 숨기고 부인인 벨라가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몰아간다. 잭이 보석을 찾느라 위층에서 분주하면 아래층에 있던 벨라가 “어둡고 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고 얘기하는데, 잭은 “네가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라며 벨라의 탓을 한다. 의아하던 벨라는 점점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무력감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을 지적하는 남편에게 더 의지하면서 자아를 잃고 망가지게 된다.




제공 : pixabay



일상적인 공간 속에서 발생하는 가스라이팅

가스라이팅은 보통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심리학자 로빈 스턴의 저서 《가스등 이펙트》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은 흔히 알려진 연인, 부부 관계 외 친구, 직장 등 다른 대인관계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위계질서가 쉽게 생기는 관계 속에서 가스라이팅 피해가 자주 발생한다. 《가스라이팅 : 성별화된 세뇌(1)》를 저술한 조은채 씨는 가해자가 가스라이팅을 행하는 이유로 “가해자는 보통 자신의 권위에 위협이 된다고 느끼거나 단순히 상대를 더 손쉽게 조종하고 싶어 가스라이팅을 한다”고 전했다. 그는 《가스등 이펙트》를 인용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가스라이팅을 저지른 이유보다는 ‘저지를 수 있는’ 혹은 ‘저질러도 되는’ 원인에 주목하고 싶다. 가스라이팅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질서 때문에 가능해졌다고 생각한다. 위계질서 아래에서 자행되는 폭력이나 착취에 둔감한 사회적 분위기도 가스라이팅을 조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깝게 생각했던 관계 안에서 당연스레 넘어갔던 말과 행동이 알고보면 피해자를 만들고 있는 경우가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피해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려워

직장인 A(28)씨는 "너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다고 나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뭐야?"와 같이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는 직장 상사의 행동이 '직장'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입사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직장 상사가 처음 무시하는 발언을 할 때는 기분도 불쾌하고, 억울했지만 거의 모든 일에 상사가 부정적인 발언을 덧붙이자 무뎌졌다. 무뎌지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본인이 매사에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상사가 찡그린 표정으로 다른 동료들 앞에서 자신에게 질책을 할 때도 '나는 이런 취급을 받아도 마땅한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훗날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접하고, 당한 행위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지만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굉장히 어려웠다. 학대의 피해자는 멍청하다고 편견을 가지는 주변인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B(23)씨의 평소에 다정하고 온화하던 애인은 다툴 때면 "넌 나같은 사람 평생 못 만나, 너의 수준이 딱 그 정도야.", "널 사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나라서 널 만나주는 거야."와 같이 자존감을 깎아 내리는 말들을 많이 했다.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미래를 계획할 만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애인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투고 감정이 상하는 일이 없어도 평소에도 무시하는 발언을 자주했다. 또한 분명히 B씨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일들을 없던 상황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저번에 내 생일에는 가까운 국내로 여행을 가자고 하지 않았어?"라고 물을 때 애인은 "무슨 소리야. 너 왜 자꾸 없던 말을 지어내? 내가 거짓말 하는 사람 같잖아. 있던 일만 말해."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폭력적인 언사가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물리적인 피해가 오기 직전에 B씨는 이별을 선택했다. 이별을 고할 때도 집착을 하고, "나 아니면 널 만날 사람이 있을 것 같아?"와 같은 말들을 자꾸 해서 '안전 이별'을 할 수 있을지 너무 두려웠던 상황이 생생하다.



제공 : pixabay



시간이 지날 수록 뚜렷해지는 가스라이팅 가해 방식

가스라이팅은 초반에는 무해하게 보일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고 피해자가 무력해짐에 따라 폭력적인 패턴이 지속되는 것이 특징이다. 가스라이팅은 아래와 같은 가해 방식의 패턴을 보인다.



1. 거부 : 학대 가해자가 피해자의 말을 아예 듣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척 한다. ex) "제발 그런 이야기 좀 그만해. 지긋지긋하다.",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왜 계속 하는 거야?"

2. 반박 : 학대 가해자가 피해자의 기억을 무조건 불신한다. 오히려 정확한 기억을 반박할 때 '가스라이팅'의 효과는 더 심각하다. ex) "너는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없구나? 그랬던 적 없어."

3. 전환 : 학대 가해자가 화제를 전환하거나 피해자의 생각을 의심한다. ex) "왜 네 멋대로 생각하는거야?", "또 oo이(피해자의 지인)가 지어낸 헛소리네. 그런 걸 믿어?"

4. 망각/부인 : 학대 가해자가 실제 발생했던 일을 일부러 까먹은 척 하거나 자기의 피해자에게 했던 약속을 부인한다. ex) "말 좀 지어내지마."

5. 경시 : 피해자의 요구나 감정을 하찮게 여겨지게 만든다. ex) "나와 이렇게 친한데 이 정도도 못참아?"



조지 사이먼 심리학 박사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은 특히 수치심 유발이나 죄책감 유발과 함께 자행될 때 효과적이다.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판단력을 의심하게 해 뒤로 물러설 수 있게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효력을 발휘한다.



친밀한 관계에서 주로 일어나 법적 처벌이 어려워

가스라이팅이 지속되었을 때 피해자에게는 우울증이나 심각한 불안증이 생겨 다른 인간 관계 속에서도 이전과 같이 행동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이로 인해 관계가 차단 될 경우, 주변 사람들에게 상담하기 어려워 상대가 가해자라는 사실 조차 깨달을 수 없기도 하다. 따라서 가해자에게 피해자에 대한 통제권이 주어지고, 다른 사람들 과의 관계를 더 단절하려 시도하게 된다. 또한 가스라이팅은 친밀한 관계에서 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법적 처벌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리분석학자인 로빈 스턴 박사는 피해 징후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1. 사과 : 피해자는 가해자가 만들어낸 문제 상황에서 모든 책임과 잘못이 본인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잘못이 없음에도 가해자에게 사과를 하게 된다.

2. 결정 불가 : 본인의 선택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든 결정권을 가해자에게 넘기게 된다.

3. 변화 : 조금씩 일어나기 때문에 인지하기 어려우나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비교했을 때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했다고 느끼고 자존 감이 낮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혼란 : 지속적인 질타로 인해 ‘내가 너무 예민한가?’라는 생각을 습관적으로 하게 된다.

5. 폐쇄성 : 자존감이 매우 떨어진 상태로 타인과의 관계에 공포감을 느끼게 되고 가해자와의 관계만 유지하게 된다.




제공 : pixabay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에 따르면 내가 혹시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자가 진단 체크리스트는 아래와 같다.



●왠지 몰라도 결국 항상 그 사람이 바라는대로 일이 진행된다.
●그 사람에게 "너는 너무 예민해", "이게 네가 무시 당하는 이유야", "비난 받아도 참아야지", "나는 그런 이야기 한 적 없어", "너 혼자 상상한 것이겠지"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변명한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 잘못한 것이 없는지 점검하게 된다.
●그 사람이 윽박지를까봐 거짓말하게 된다.
●그를 알기 전보다 자신감이 없어지고 삶을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




김도연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 소장은 "가스라이팅을 유발하는 말은 흔히 '너 메시지'가 많다"며 "이런 말들은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의도가 깔린 말들"이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가해자 본인은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이같은 화법은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의 정서적 욕구를 채우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체성 회복이 우선, 사회 구조 속 고질적인 문제도 해결되어야

가스라이팅이 오래 진행 되다 보면 피해자는 의존적 인격성향을 띄기 쉽다. 가해자에게 중요한 결정들을 모두 맡기고, 외부 관계들을 단절하게 되면서 가스라이팅이라는 정신적 학대 속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아진다. 특히 가스라이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피해자가 자신이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구조 속 고질적인 문제도 큰 영향을 미친다. 임명호 단국대학교 심리학 교수 역시 우리 사회의 성취 지향적이고 경쟁 지향적인 문화에서 가스라이팅의 원인을 진단했다. 임 교수는 "가족, 연인, 직장 선후배 관계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 관계로 인식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이런 관계에서까지 우열을 따지려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다보니 개인적으로도 '내가 이 관계에서 성취한 권력을 잃고 을이 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이 쌓여 정신적 학대를 통해 상대를 짓누르며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무시해도 되는 사람, 나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 보다는 함께 협력하고 공존하는 건강한 관계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이제는 더 견고히 자리 잡아야 하지 않을까.



Tag
#가스라이팅
#학대
#심리현상



저작권자 © 한국연예스포츠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지환 기자

출처 : 한국연예스포츠신문(http://www.korea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