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 취향을 저격한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의 활약
아직은 불안정한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한국연예스포츠신문] 조세령 기자 = 코로나 이후 잠잠했던 극장가에 활기를 불어준 작품이 있다. <업>, <인사이드 아웃>을 제작한 피트 닥터 감독의 신작 <소울>은 국내 개봉 이후 설 연휴 내내 박스 오피스 1위 자리를 지켰다. 올해 들어 첫 150만 명의 관객을 끌어 모으며 픽사 애니메이션의 위엄을 다시금 입증했다. 조성진 CGV 전략지원담당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소울’이 2.5단계 방역상황의 어려움 속에서 콘텐츠가 있으면 관객이 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줬다”며 극장가 상황이 호전될 수 있음에 기대감을 보였다.
현재를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소울>은 고민 많은 어른들을 위한 메시지를 담았고 관객들은 이에 긍정적으로 응답했다. ‘네이버 영화’ 관람평에는 “철학적 메시지가 담겨있어서 어른들이 보기에 좋은 영화”, “어른들에게 쉬어 가는 시간이 되는 영화” 등의 후기가 주를 이뤘다.
<소울> 흥행 이전부터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는 평을 받아온 작품들은 많았다. 이제 애니메이션 영화는 아이들부터 그 어린 시절을 지내온 어른들까지 다양한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장르로 자리잡은 것이다. 어른들의 발길을 머무르게 한 애니메이션 영화만의 특별한 흥행 요인은 무엇일까.
지친 마음을 ‘뻔하지 않게’ 위로하는 동화
실사 영화였다면 억지스럽게 느껴졌을 설정도 애니메이션이기에 자연스럽게 녹아 드는 경우가 많다. 피트 닥터 감독의 ‘내면 세계 시리즈’라고 불리는 <인사이드 아웃>과 <소울>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비현실적인 상상의 세계를 실제로 있을 법한 곳으로 구현하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뻔하지 않게 전달해냈다. 작품에 개연성이 부족하면 ‘몰입도가 깨진다’고 비판하는 어른들도 곧장 빠져들 수 있도록 논리적인 접근을 더한 것이 성공 요인이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속 캐릭터 / 출처: 네이버 영화
‘진짜 나를 찾는 시간’을 선사해주겠다는 포부로 등장했던 <인사이드 아웃>은 개봉 초기에는 박스 오피스 4위에 머무르다가 입소문을 타고 역주행 신화를 기록하며 총 490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사람의 감정을 의인화한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이라는 다섯 캐릭터는 11살 사춘기 소녀의 감정 변화와 성장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나갔다. “감정 연구로 유명한 심리학자와 뇌과학자의 자문을 받아 어른도 공감할 수 있는 치밀한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강조한 제작진의 노력은 훌쩍 커버린 관람객들의 마음을 울렸고 ‘모든 감정은 소중하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어른들은 사춘기 시절 겪었던 복잡한 감정의 원인이 영화 속 ‘감정 컨트롤 타워’에서 밝혀지는 과정을 함께 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의 힘을 다시금 발견하고 ‘숨겨진 나’를 찾아 나갔다.
영화 '소울' 에 등장하는 영혼 세계 / 출처: 네이버 영화
한 번쯤 들어봤을 삶의 교훈에 ‘태어나기 이전의 세상’이라는 상상력을 더하며 깊은 내면을 솔직하게 분석하는 매력은 <소울>에서도 드러난다. 이루지 못한 재즈 피아니스트라는 꿈을 품고 살아가는 주인공 ‘조’는 지구로 내려가기를 거부하는 영혼 ‘22’를 만나면서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목적보다 의미 있는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배운다. 영화에 등장하는 ‘지구 통행증’이나 ‘불꽃’, ‘성격 파빌리온 전당’ 등의 설정이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 모든 것들이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에 설득력을 더해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대학생 A씨(25세)는 “해석할 여지가 많은 영화라서 여러 번 봐야 완벽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유튜브에 업로드 되어 있는 ‘소울 해석’ 영상들에는 영화에 여운이 남은 어른 관람객들의 열띤 반응이 댓글창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릴 적 동심의 세계를 완성해주는 한 조각
말하는 눈사람이나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집, 내가 잠자는 사이에 작당 모의를 꾀하는 장난감들. 어린 시절 상상해봤을 법한 일들이 실제로 펼쳐지는 애니메이션은 현재와 동심의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영화나 장난감에 열광하거나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어른을 일컫는 단어로 알려진 ‘어른이(어른+어린이)’나 ‘키덜드(Kid+Adult)’가 더 이상 유아 퇴행적인 단어가 아니라 하나의 취향으로 여겨지면서 애니메이션 계는 이들을 타겟으로 한 영화 제작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
'겨울왕국'에 등장하는 올라프 캐릭터 / 출처: 네이버 영화
국내에서 애니메이션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겨울왕국>에는 눈 덮인 하얀 왕국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 ‘엘사’가 등장한다. 메인 프로듀서 피터 델 베초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겨울왕국의 배경이 된 왕국을 표현하기 위해 제작진이 실제로 눈이 쌓인 눈밭을 걷고 뛰면서 ‘그럴 듯한’ 장면을 연구했다”며 “눈과 얼음을 실감 나게 보여주면서 꼭 현실처럼 믿어질 법한 배경을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관객들은 꿈꾸기만 했던 동심 속 세상이 기술의 힘을 입어 구현되는 과정을 보는 묘미에 극장을 찾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린 시절 흔히 보던 디즈니 공주에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하는 모습 등 긍정적인 변주를 더한 새로운 느낌의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엘사의 테마곡 ‘렛잇고(Let It Go)’가 큰 화제를 모았던 이유도 두려움이 담긴 엘사의 내면과 이를 헤쳐 나가고자 하는 당당한 마음가짐이 마치 어른들의 고민을 투영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업' / 출처: 네이버 영화
때로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 꿈을 찾아가는 과정에 관객이 동반하기도 한다. 꿈과 패기가 넘치는 소년 ‘러셀’과 아내를 잃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칼’이라는 상반된 캐릭터의 만남으로 시작된 모험을 담은 영화 <업>이 대표적이다. 집에 헬륨 풍선을 달고 파라다이스 폭포로 탐험을 떠난다는 설정은 알록달록한 풍선이 떠오르는 장면을 보는 관객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현실의 어른으로 자라버린 관객은 ‘칼’이 모험을 떠나면서 점차 활기를 찾아가는 모습을 통해 무모해서 오히려 빛나던 어린 시절 꿈을 다시금 상기시킬 수 있었다.
영화 '토이스토리 3' 캐릭터 / 출처: 네이버 영화
언젠가는 보내주어야 할 동심의 세계를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방법도 애니메이션에 담겨있다. 1995년부터 픽사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토이스토리> 시리즈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한다. 가장 최근 시리즈인 <토이 스토리4>의 관람객 추이는 영화 속 장난감들과 함께 웃고 울었던 어른들의 애정 어린 관심을 증명한다. 아이들과 함께 동반 관람하는 경우가 많은 3~40대 관람률을 제치고 20대 관람률이 41%로 1위를 달성했다. 이동진 영화 평론가는 <토이 스토리3>의 후반부에 앤디가 정들었던 장난감을 이웃집 소녀 보니에게 넘겨주는 장면을 언급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줘야 하는 이별이 찾아온 순간에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대신에 고맙다고 말을 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 픽사는 알고 있다”고 말했다. 어설프게 마무리 지었던 어린 시절에 다시 한번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네는 영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은?
(왼쪽) '마당을 나온 암탉' 포스터 (오른쪽) '스트레스 제로' 포스터 / 출처: 네이버 영화
안정적인 어른 관람객 층을 확보한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이 디즈니∙픽사 작품인만큼 국내 애니메이션의 인지도는 현저히 낮다. 2011년 220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애니메이션의 희망찬 미래를 꿈꾸게 했던 <마당을 나온 암탉>을 제작한 오돌또기 스튜디오의 신작 <언더독>도 총 관객 수 19만 명이라는 저조한 성적에 그쳤다.
이번 달 초 <스트레스 제로>라는 작품으로 찾아온 이대희 감독은 “애니메이션 극장판은 흥행이 어렵다는 인식이 있어 투자도 위축돼 있다.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애니메이션이 나와야 하는데 쉽지 않다”고 전했다. 국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게임이나 TV시리즈에 집중하고 있는 데에는 유아용 애니메이션이 위험도가 낮고 비교적 흥행이 보장된 안정적인 시장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낮은 제작비로 어쩔 수 없이 어른 관람객 층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어른의 취향을 저격한 우리나라 작품은 국내에서 시장성이 작다. 당연히 인프라도 부족하고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어렵다”고 덧붙였다.
아직은 공백기도 길고 성과도 미미한 국내 시장이지만 나름의 돌파구를 찾아 나가고 있는 듯하다. 홍성호 감독의 <레드슈즈>는 지난 2019년 국내를 비롯해서 유럽, 호주 등 세계 123개국에 공개되었고 지난 9일 제93회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1차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해외 시장으로의 진출을 꾀하며 한국 애니메이션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중인 것이다. 우리나라 애니메이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갈 우수한 인력을 품어 줄 제작 환경의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채로운 애니메이션 시장을 기대하며
애니메이션은 세대를 불문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창작물이라는 장점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적으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창구로 활용된다면 앞으로 더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시도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디즈니의 변신으로 주목받던 여성 캐릭터의 변화된 모습이나 다양한 인종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작품들이 늘어난 것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고자 하는 노력이 담긴 산물이다. 당장에 <소울>만하더라도 픽사 애니메이션 최초로 흑인 주인공을 등장시키며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심리학자 길영란은 애니메이션을 선호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애니메이션이라는 장치가 심적 완충제의 역할을 해준다고 말했다. 고정 타깃층인 어린이들에 이어 티켓 파워를 가진 성인 관객층의 관심까지 더해졌기에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애니메이션 작품이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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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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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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